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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M

...몇 번째 날이더라?



첫 번째 날

두 번째 날

세 번째 날

네 번째 날

다섯 번째 날

여섯 번째 날

일곱 번째 날




  자다 깨는 것을 몇 시간 동안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눈을 뜨니 다시 똑같은 풍경이다. 똑같은 바닥, 똑같은 의자, 똑같이 음산한 빛을 발하는 누런 조명까지….

  배신자는 즉결처분이라느니 겁을 줄 땐 언제고 하나같이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게 슬슬 이놈들이 나를 죽일 생각은 맞는 건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뭐, 죽지 않고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야 나한텐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볐다. 고개를 들며 늘어지게 하품이나 하려는데,

  "뭐, 뭐야…!"

  나는 앉아있던 의자가 덜컹거릴 만큼 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모르는 남자가 서있었으니까. 상황판단을 위해 아직 꿈속에 빠져있는 것 같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댔다. 그러니까…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또' 레드핸드에서 쳐들어왔다, 이거지 지금…?

  "하아… …."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헤집었다. 남자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고 있는 타깃쯤이야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랬다면 나는 죽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끝이었겠지. 전날만 해도 마찬가지다. 제길. 요 며칠간 피곤한 일이 많긴 했지만… 방심했군.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한번 바라본 남자는 키가 6피트는 더 되어 보였다. 깔끔하게 넘겨 올린 포마드 머리나 보는 이가 갑갑할 정도로 딱 맞는 쓰리피스를 차려입은 꼴이, 인파가 북적이는 시장통에서 마주쳐도 한눈에 마피아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얼굴의 3분의 1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까지 달고 있으니 엮이면 팔자가 단단히 사나워질 인상이었다.

  저 정도 체격이라면 역시 행동부대겠지. 이번에야 말로 확실히 제거 명령이 떨어진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 …."

  하지만 남자는 내가 온갖 소란을 부리며 부산스럽게 깨어난 이후로도 처음 본 모습 그대로 뒷짐을 진 채 문 앞에 서있었다. 그게 다였다. 지금까지 왔던 놈들과는 다르게 입을 꾹 다물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 정적은 무슨 의미지? 심리전인가? 침묵의 압박을 이겨내고 슬쩍 올려다본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있지 조차 않았다.

  그렇게 10분이고 20분이고 아무런 반응도 없는 남자를 앞에 세워두고 딱딱한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시간을 죽이며 그를 뜯어본 결과, 목 끝까지 당겨 올린 검은 넥타이에 은은한 금색 자수가 놓여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이런 싸구려 조명 아래서도 번지르르한 게 정장에 돈 좀 썼나 보네. 음? 보통 여섯 번째 단추는 잠그지 않고 남겨두지 않나…? 하여간에 답답한 놈이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픽, 헛웃음이 샜다. 하 진짜. 레드핸드에서 온 놈을 앞에 두고 잠이나 마저 잘 수도 없고 말이야….

  "그으… 우리 구면이던가…? 좀 앉기라도 하지?"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연 쪽은 나였다. 날 죽일지도 모를 인간에게 자리를 권유하다니! 하지만 더 이상의 침묵은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난 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말 한마디 하기는커녕 한 발자국도 움직이질 않고 목석처럼 서있으니… 신경이 곤두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 …."

  … 진짜 이러기야? 나를 흘긋 본 남자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게 저 놈의 작전이 아닌 이상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먼저 액션을 취해야 하는 건가? 애초에 저놈이 원하는 무언가가 있긴 한 거야…? 혹시 쫄아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건…. 그래, 그럴 리는 없겠지.

  "내 기억으론 마주친 적이 없는데. 그럼… 쌘삥인가? 하기야 뭐, 내가 그 징글징글한 모든 얼굴들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부대는, 정찰부대? 행동부대…? 씁, 연유는 모르지만 젊은 나이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곳에 들어가다니. 그쪽도 참 재수가 없게 됐군."

  대놓고 반응을 유도하는 말을 던졌다. 쏘아붙이는 말이라도 들어야 저 가죽 안에 들어있는 게 깡통로봇이 아니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별 말 없이 허공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허, 이것도 아니다 이거지? 사이코 같은 자식….

  그대로 또 시간이 흐르길 몇 십분. 한없이 가라앉은 적막 속에서 들리는 것은 나의 숨소리뿐이었다. 아니 저놈은 도대체 여길 왜 온 거야…? 이전 놈들의 행동도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던 건 매한가지였지만, 이번에 온 정체불명의-아마도 레드핸드의 행동부대원인- 남자의 의중은 특히나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끝까지 보고만 있을 작정이라면… 오히려 쉽게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고개를 드밀었다. 놈이 답답한 만큼 둔탱이인 쪽이라면 더욱 가능성이 있을 테고….

  "저… 큼, 내가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너도 알다시피 같이 가줄 교도관도 없고. 잠깐만 다녀올 테니까 어떻게 좀… 비켜줄 수 없겠나?"

  화장실이라니, 역시 너무 뻔한 변명인가. 하지만 그 뻔한 방법이 먹히는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난 그것이 바로 지금이길 간절히 바랐다. 제발…! 행운의 여신의 가호가 내게 닿기를!

  "정말 급하다고. 네가 오기 전에 누가 생수병 하나를 던져줬었거든. 아니면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시게? 안 비켜줬다가 실수해도 난 모른다?"

  최대한 능청스러운 척 말투를 꾸며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진짜로 요의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완전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 셈이었다. 이거 원, 무슨 말이라도 해야…. 슬슬 눈치를 보며 앉아있던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자 내내 못 박힌 듯 꿈쩍 않던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 입, 닥쳐라."

  그 무거운 입에서 나온 말은 네 글자가 다였다.

  "앉아."

  … 아니, 여섯 글자였다. 하, 하하.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여기서 이렇게 쉽게 물러나 버리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놈의 면상을 보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핑계들도 저 깊숙이 들어가 버려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마피아라는 족속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그러나? 물론 아직 손끝 하나 닿지 않았지만, 저 눈빛을 보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 정말이지 이건 신종 고문법임에 틀림없다.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있고 내 불안과 초조는 한계에 달해있었다. 머릿속엔 온갖 가정들이 뒤죽박죽 뒤엉키고 다리는 달달 떨렸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한 대 맞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돌아가며 구경난 것처럼 들락날락하더니 이건 뭐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도끼눈을 뜨고 야려봐도 남자는 묵묵부답이다.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만약 피를 말려 죽이는 게 놈의 계획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차라리 들이닥쳐 총부리나 칼 따위를 들이밀었으면 그에 맞게 대응을 했을 테지만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대 앞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생각보다도 더 끔찍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날 죽일 수 있는 상대와 오붓하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끈적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몇 시간이고 독방에 갇혀본 경험이 있는가? 나도 없었을 거라고. 저 자식만 아니었으면.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왔다간 이들보다도 남자는 훨씬 더 긴 시간을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보스가 네 놈이냐? 가서 좀 더 간이나 보다가 끝내버리라고, 위에 있는 누가 그러디? 근데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시시하게 시간을 끌고 계시는데…."

  나는 옆에 보란 듯이 놓아두었던 약통을 들고 일어나 남자에게로 향했다. 한 발짝씩 가까워져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눈을 꾹 감았다가 느리게 뜰뿐이다.

  "정체 맞추기 게임이나 한번 해보자고. 전에 왔다 간 놈한테 이런 걸 받았어. 하프문. 아마 너도 알고 있는 놈이겠지? 그래서 열어봤더니… 웬 알약이 들어있더라고."

  나는 병뚜껑을 열고 알약 한 알을 손바닥에 부었다. 겉으로 봤을 때 평범하게 작고 동그란 알약의 한쪽 면에는 'D4'라고 적혀있었다.

  "이게 뭐일 것 같나? 난 무서워서 입에도 안 대봤어. 독약인지 뭔지 알 길이 없잖아. 근데 뭐, 생각해 보니 곧 죽을 목숨인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는 손바닥에 있는 것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고 씹어 삼켰다. 혀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쓴 맛에 잔뜩 인상이 찌푸려졌다.

  "웩, 맛없어…. 뭔 약이야 이게."

  으, 몸서리를 치며 다시 알약 몇 개를 손에 부었다. 슬쩍 올려다본 남자는 나의 헛짓거리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나는 손에 든 알약을 세게 쥐었다.
  비록 지금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지만, 내게도 못 볼 꼴 다 보며 뒷골목에서 구른 짬바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지금 강력히 경고음을 울려댔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이대로 감방 탈출에 실패하면 그다음은 이승 탈출일터였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고 더이상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통에 남은 것들을 모조리 손바닥에 털어붓고 온몸을 날려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 …!"

  내내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던 남자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나의 어깻죽지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와…! 무슨 힘이…. 각오는 했지만 몸으로 직접 느껴지는 감각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잡힌 부위로부터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왔다.

  "이제, 네 차례잖아. 응?"

  왼손으로는 알약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붙든 남자의 팔 안쪽으로 집어넣어 옷깃을 잡아챘다. 하지만 이전의 부상 탓에 떨리는 손으로는 힘을 줘 잡아당기기는커녕 붙잡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제기랄, 그 애송이가…!
  남자는 내 손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렸지만 이미 문에 딱 붙어 서있던 터라 비켜날 공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순간, 그가 몸을 돌려 위치를 바꿨다. 내 등은 그대로 철문에 부닥쳤고 텅!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귓가에 울렸다. 역시 이 곰 같은 덩치를 상대로 정면돌파는 무리였던 건가. 하지만 이렇게 죽으란 법은 없는 건지 이 방에 들어온 이래로 가장 가까이, 바로 지금 나의 등 뒤에 탈출구가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 문만 열면 어떻게든 뿌리쳐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오히려 잘 된 거야. 몰아붙이는 놈을 저지하던 팔을 빼내 문을 열어보려 시도하는 찰나. 그런 알량한 수법은 어림도 없다는 듯 남자가 나를 바닥에 찍어 눕혔다.

  "아윽, 좀…!"

  그는 한쪽 무릎으로 나를 내리눌렀다. 정말 더럽게 무거웠다. 묵직한 압박에 편히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나는 밑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그는 나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아 제압했다. 완전히 꼼짝달싹도 못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이고 대치를 하고 있자니 이제는 더이상 반격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널브러져 힘 빠진 숨이나 색색 내쉬고 있는데 문득 떠오른 또 하나의 의문점이 있었다. 왜 무기도 주먹도 쓰지 않는 거지? 남자는 나를 제압하려 할 뿐 별다른 상해를 가하지 않고 있었다.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은 놈, 봐주기라도 하려는 건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잘하면… 손이 닿겠는데. 눈치채지 못하게 몸을 비틀며 탈출하려는 척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봤자 몇 센티 거리가 줄었을 뿐이지만 이 정도면 의자의 다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는 한 번. 스피드가 중요했다. 나는 힘껏 팔을 뻗어 의자를 잡아챘다.

  "으아악!"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의자로 남자의 머리를 후렸다. 그는 방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팔을 머리께로 올렸고 내 몸의 반절 정도는 자유가 되었다. 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놈의 제압이 허술해진 틈을 타 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의 등 뒤로 가 이마를 당겨 고갤 젖혔다. 알약이 든 왼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공방을 벌이며 몇 개를 떨어뜨린 것 같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나는 남자가 그것을 삼키도록 뒤통수를 세게 끌어안았다.

  퍽, 남자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가격했다. 이미 성한 곳이 없는 몸뚱이에 충격이 가해지자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하마터면 그를 잡고 있는 손을 놓을 뻔했지만 이것이 목숨줄이라 생각하고 두 눈을 부릅 떴다.
  나는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남자를 짓눌렀고, 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나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나는 남자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 …8년 전쯤인가? 옆동네에서 카포레짐 하나가 배신을 때리고 튀었다고, 우리 바닥에서는 꽤나 떠들썩했었는데 말이야. 그놈을 찾겠다고 여기저기를 다 뒤졌는데 찾을 수가 없더래. 그래서 이미 죽었다느니 신분세탁해서 어딘가 살고 있다느니 말들이 많았거든. 근데 개중엔… 그놈이 레드핸드에 숨어들었다는 얘기도 있었어. 이미 이곳에 물들은 놈이 멀리 나가진 못했을 테고, 이제 막 생겨난 조직에 몸을 숨겼다는 거지."

  남자의 거친 반항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억세게 나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삼킨 건가? 일순 얌전해진 그의 관자놀이에는 퍼런 핏줄이 불뚝 솟아있었다. 그가 내쉬는 뜨겁고 거친 숨이 입을 막고 있는 손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음, 그럴싸한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보스께선 1인분 할 능력만 되면 어디서 굴러먹다 배신을 때린 놈이라도 상관없이 받아주시잖아. 참 아량이 넓으시기도 하지…."

  나는 불안정한 호흡 사이로 끅끅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쥐새끼… 너 맞지? 너 같은 놈도 잘만 사는데, 왜 내가 죽어야 돼!"

  뻑-!

  순간 눈앞이 암전 되었다.
  내가 중심을 잃고 널브러지자 놈이 다시 멱살을 낚아채 두 번째 주먹을 꽂았다. 코 끝에선 피비린내가 올라오고 두 귀에는 이명이 울렸다. 나의 모든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느꼈다. 놈은 세 번째 주먹을 날릴 듯 숨을 헐떡이더니 나를 바닥에 던지듯 내팽개쳤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려나. 시야가 흐리게 돌아오고 콘크리트 바닥이 가득 차게 보였다.

"아으…. 아…."

  내가 바닥을 기며 정신줄을 붙잡기 위해 바둥거리는 동안 남자가 외투 속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후우… …."

  고개를 치켜들고 한숨을 내쉰 남자가 그대로 목을 반바퀴 돌려 나를 내려다봤다.
뒤이어 철컥- 자동권총의 슬라이드가 당겨지는 소리가 났고… 또다시 정적.

  배신자의 말로는 뻔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의 시체에도 붉은 도장이 찍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이럴거면 애초에 깔끔히 끝내줄 것이지 질질 시간을 끌 건 뭐란 말인가.

  나는 여전히 바닥에 딱 붙은 채로 남자가 방아쇠를 당기기만을 기다렸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뻔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지나간 시간들을 되새기며 이런 게 주마등이라는 건가 하던 때에, 남자가 겨누고 있던 권총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쭈그려 앉아 떨리는 호흡을 길게 뱉으며 마른세수를 해댔다. 나는 자리에 굳어 그런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남자를 향한 나의 예상은 대체로 들어맞지 않았고 예측 불가한 상대와의 싸움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발로 바닥을 밀어내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감이 기분 나쁘게 숨을 옥죄어 왔다.

  "… 이미 널 여러 번 살려줬다. 참고, 참고, 또 참고…."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한 남자가 미간을 누르더니 나의 피로 물든 손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어라 더 중얼거리는 것 같긴 했지만 손에 가로막혀 웅얼거리는 소리까지 알아들을 순 없었다.

  "… 왜, 왜 쏘지 않은 거야. 아니 너는 그전부터, 처음부터 그랬어. 총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고, 내가 하는 반격을 그대로 맞고만… …."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금수새끼의 것 같은 검은 동자가 소름 끼쳤다.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나를 내려다봤다.

  "… 내가 널 죽일까 봐."

  그리 말하는 표정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작은 움직임도 없이 한참이나 나를 뜯어보는 남자에 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분이 지나서야 그는 무언가 마음을 굳힌 듯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딸려 올라간 바짓단을 잡아 내리고 구겨진 재킷 밑단을 당겨 주름을 폈다. 잠시나마 흐트러졌던 머리칼은 손으로 두어 번 쓸어 넘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히 정리되었다.

  이곳에서 한바탕 뒹군 일 따위 모두 없었던 것처럼, 냉랭하리 만치 차분한 모습을 되찾은 남자가 말했다.

  "앞서 왔던 저급한 놈들이랑 날 동급으로 생각하지 마라. 단지 네놈을 괴롭히기 위해 몇 시간이고 처박혀 있던 게 아니니까…."

  애초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이제 알겠다. 하지만 이전의 상황으로 미루어봤을 때, 남자가 나를 순순히 탈출시켜줄 가능성 또한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남자 다음으로 올 사람이 남아있다는 건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처분이….

  "너를 처리하는 건 나의 역할이 아니야. 그럴싸하게 세워놓은 허수아비… 그뿐이지. "

  어느새 다시 깊게 가라앉은 동태 눈깔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카포께서 오실 시간이다."

  
남자는 곧장 뒤돌아 방을 나갔다.
  쇠문이 무겁게 닫히며 울리는 소리가 사형을 선고하는 것만 같았다.